◆ 한국전쟁이 끝나고 숭실이 재건하던 날
1953년 겨울, 그는 숭실대학교에 지망했다. 당시 숭실대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자진폐교 후 재건하여 첫 번째 신입생을 선발한 것으로, 영락교회 일부를 임시 교사로 써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나오니 한경직 목사님이 천여 명이 넘는 수험생을 불러다 종이 한 장씩 나눠주며 주기도문을 아는 만큼 써보라고 했어요.
저는 평소 교회에 다니던 터라 알았지만 미션스쿨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수험생들은 난처했겠죠.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평일에는 수업을 듣고 주말에는 교회를 가기 위해 일주일 내내 영락교회를 다녔다. 돌이켜보면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정적으로 살았던 시간이었다.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한 학교 선배님들이 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무던히 고생했고 헌신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덕분에 4년째 되던 해에는 상도동 캠퍼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요. 지금 숭실대는 그렇게 많은 이의 정성으로 축조한 학교랍니다.”
◆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힘
지금도 취업이 어렵지만 195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에 기간산업이 전무하던 시절로 대학생들이 인기직장으로 금융기관, 공기업, 공무원 등을 꼽을 때였다.
“졸업하고 다행히 농협에 취업해서 5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장학생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2년을 예정하고 갔는데,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해 외국인 유학생들이 모두 귀국길에 올랐어요. 그때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향했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단돈 2백 달러로 시작한 미국 생활은 고되고 외로웠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전문지식을 쓸 길이 없었고 청소며 공장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밑천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소매상에서 호텔 건축까지 다방면의 사업을 주도하는 경영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모교를 돌아보며 54학번 맏이로서 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배들에게 조금 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 발전기금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실천할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후배들이 졸업 후 진로에 고민이 많은데다 우리나라 경제상황이 쉽지 않음을 잘 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타국에서 생활해 보니 다양한 시각에서 미래를 생각할 것을 권하고 싶다고 한다.
“멀리서 지켜본 한국의 발전상은 실로 놀랍습니다. 숭실도 마찬가지죠. 지난번에 교정을 방문하고 정말 놀랐고 기뻤습니다.
다만, 후배들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소모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넓은 세상이 있습니다. 남들과 비슷한 스펙만 쌓지 말고 자신만의 경쟁력으로 넓은 세상과 마주해보길 권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일상이 달라지고 그 삶은 다른 궤도를 가지기 시작한다. 그는 선을 베풀고 좋은 멘토를 찾으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다.
스스로 명상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되 책을 많이 읽으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그가 들려준 숭실 사랑의 뜨거운 열정이 세월을 무색하게 했다.
그는 자랑스러운 숭실인이다.